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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 부대에서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 날은 하염없이 긴 장마 중 하루였을 것이다.

 시인의 감수성을 내게 갖다 댄다는 것은 그에게 욕된 일이겠으나, 오늘 같이 마음이 괜시리 아픈 날에는 감히 시인의 감수성을 슬쩍 빌려와도 되지 않을가 싶다. 마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양,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되뇌어 본다. 어떤 이는 내게 삶과 죽음의 열망이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누구보다 순수한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또 어떤 이는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허나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가르쳐 주었고, 인간의 감수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통찰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어떤 과정으로 그들과의 관계가 진행되었던 간에, 내게 있어 그들의 이름은 그 소중한 통찰들만큼이나 반짝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름다운 이름들을 되뇌이며 왠지 모를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 그 모든 이름들은 내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었는데,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내 모습은 그저 형편없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내 미적 감각이 그리까지 형편없진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나라는 사람의 그릇 문제다. 마치 최고의 재료를 형편없이 버무려 이상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리사인양. 

 왜 이리 나라는 그릇이 엉망인가 생각해본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안 좋은 버릇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책을 몹시도 게걸스레 읽는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대충대충 페이지를 넘기며. 옛말에 등에 비수가 놓여있듯이 책을 읽으라는데, 책 한권도 완벽하게 읽지 않는 내가, 사람을 완벽히 이해할 리가 없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고, 자기본위적이고, 배려심이 없다. 일단, 나는 사람 하나를 내 마음 속에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게으르다.

 나는 사람을 볼 때 드문드문,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본다. 그나마 내가 보고 싶은 부분이라도 자세히 보면 다행일 텐데, 그러지 못하고 마치 책장 넘기듯, 휙휙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아름다운 이름의 아름다운 통찰을 보더라도, 이 모양 이 꼴이다. 늘상 드문드문이니 내 속에 고스란히 그의 아름다움이 쌓일리가 없다. 이래서야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마치 진눈깨비처럼, 내 마음안에 잠깐 앉았다 녹아내릴 뿐. 내 마음은 갖가지 단상들이 뒤섞인 진창이 되어버린다. 더러워.

 이런 추함을 버티지 못하여, 그 아름다운 이름은 내게 되뇔 수 밖에 없는 이름이 되었나보다. 그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추함에, 그대는 눈처럼 훨헐 - 그나마도 더욱 슬픈 것은, 그 이름들은 그토록 지저분한 나의 마음에 눌러붙어, 내 안에 차곡차곡, 죽을만큼 쌓여버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닦이지 않는 얼룩인양. 그대는 눈처럼 날아갔는데, 그대의 이름만은 내 안에 남아 나의 더러운 마음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낸다. 나는 그 사실에 괜시리 한숨을 쉬고,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내리는 저 비도 아마 진눈깨비가 되겠지, 또 다시.
# by 노래하는장돌뱅이 | 2009/08/17 16:28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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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awu at 2009/08/18 02:07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때는 차라리 도색을 해버려 @_@
근데 페인트가 없다..ㅈ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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